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5대 대통령 선거 (문단 편집) == 박정희 사상 논쟁 == 지금에야 박정희가 보수의 아이콘이지만, '''당시에는 박정희가 진보의 지지를 받았다.'''[* 물론 민주공화당과 박정희 측 스스로는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62112800209201001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62-11-28&officeId=00020&pageNo=1&printNo=12640&publishType=00020|보수를 표방]]하였다.] 이는 유력 명문가 후손이었던 윤보선과 달리 박정희가 빈농 출신으로서 서민을 대변할 것이라는 기대 탓도 있었지만, 윤보선 측의 [[색깔론]] 공세가 역효과를 내어 진보 유권자들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결집하게 한 부분도 컸다. [[투표]]까지 3주 정도 남았던 9월 23일, 박정희 측에서 라디오 방송에서 윤보선을 '가장된 민족주의'라고 공격한다. 이에 대응하듯 다음날 [[윤보선]] 후보가 [[전주시|전주]]에서 유세 도중 '''"[[여수·순천 10.19 사건|여순사건]]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.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."'''는 발언을 하면서 선거 구도는 순식간에 사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. 박정희 후보의 1940년대 말 '''[[남조선로동당]]''' 활동 경력[* 박정희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는데, 형 [[박상희]]가 좌익 인사였다. 이로 인해 [[대구 10.1 사건]] 때 경찰에 의해 살해 당했고, 본인 말로는 복수심 때문에 남로당에 잠시 가담했다고 하지만 [[남조선로동당]]은 [[박헌영]]과 밀접한 연관이 없을 수가 없다. 이로 인해 여순사건에서 사형 판결까지 받았었다.]이 문제였는데, 군정 시절에 2공화국에 몸담았던 구 정치세력을 사대주의적인 민주주의자로 공격하며 자신은 민족적 민주주의자라는 요지의 발언을 자주 하였는데, 윤보선 후보는 '''그렇다면 그 민족적 [[민주주의]]라는 게 설마 [[공산주의]]였던 것이냐'''는 역공을 하였다. 이러한 주장에 대해 [[박정희]] 후보 측에서는 '''[[매카시즘]]''' 공세라고 비판하면서 지금은 확실하게 전향하였다고 주장하였다. 한편 선거 5일 전날 [[10월 10일]]에 민정당 측의 [[김사만]]은 [[영주시|영주]]에서의 연설에서 ''''[[대구광역시|대구]], [[부산광역시|부산]]에는 빨갱이가 많아요. [[김일성]]이가 오면 만세를 부를 거에요.''''라는 발언을 하며 이런 매카시즘 공세에 불을 질렀다. 당황한 민정당 측은 사과했지만 한 기사가 언급한 대로 민권투쟁의 진원지라는 좌파적인 성향의 경상도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했다. 한편 윤보선 역시 야권 후보들에 의해 공세를 받았는데, 특히 [[5.16 군사정변]] 당시 [[대통령]]으로서 '''"[[장면]] 등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[[쿠데타]]를 방조한 것 아니냐?"'''는 의혹이 제기되었다. 이에 대해 [[윤보선]]은 "[[장면 내각]] 하에서 데모와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으며, 자신은 결국 군사정부를 추인하지 않았다"고 방어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